한진로즈힐 뒤편서 삼도수군통제사사적비 24기 발굴
모두 全義 李氏 가문의 통제사 8명의 사적비
통영시 무전동 한진로즈힐 뒤편 언덕에서 발견되었던 삼도수군통제사와 관련 된 비석이 모두 전의 이씨(全義 李氏) 집안의 삼도수군통제사의 비석으로 밝혀져 또 다른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7일 오전 9시 경 가야문화재연구소 관계자와 통영시가 공동으로 발굴을 시작할 무렵만 해도 10여기 정도의 비석이 매몰되어 있을 거란 추측했지만, 모두 24기의 비석이 나왔고 모두 전의 이 씨 출신의 통제사와 관련된 비석들이었다.
발견된 비석은 모두가 사암으로 제작되었고 크기는 150cm에서 190cm로 무게는 500kg에서 1톤에 육박한다. 한 두기의 비석들은 두 동강으로 파손된 상태였고 글자가 많이 훼손된 비석도 있었다. 통영시는 학계와 가야문화재연구소에 검증을 의례하여 정확한 고증을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날 확인된 전의 이씨(全義 李氏) 통제사는 가장 윗대인 65대 이세선 통제사를 시작으로 79대 이창조 통제사, 110대 이의풍 통제사, 120대 이윤성 통제사, 139대 이방일 통제사, 145대 이윤경 통제사, 169대 이완식 통제사, 182대 이희경 통제사로 밝혀졌다.
1687년도부터 1856까지 통제사로 부임해 통영에서 근무한 인물들로 한 가문의 170년의 역사가 어느 순간부턴가 땅에 묻혀 있다가 다시 세상에 나온 셈이어서 이제 이 비석들이 한 곳에 매장된 이유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적비는 원례 그 사람을 공적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세우는 것인데 이런 비석이 무더기로 매몰된 채 발견된 것도 처음있는 일이다. 특히 종2품 통제사들을 대거 배출한 위세등등 했을 한 가문의 사적비들이 한 곳에 묻힌 것은 매우 특이한 일로 그 사연에 많은 의문과 가설들을 낳고 있다.
6,25전쟁 때 비석 보호를 위해 묻었을 수 있다는 설과 "일제강점기 후손들의 안전을 위해 모두 한 곳에 묻었다"는 말을 들었다는 한 전의 이씨(全義 李氏) 후손의 주장도 있지만 확실한 사연은 현재로써는 불투명하다.
이곳은 무전동 한진로즈힐 뒤편 언덕으로 현재는 농작물을 재배하는 밭이다. 비석이 발견된 몇 발자국 아래로 통영으로 입성하던 옛 길(말구리 길, 통제사 길)이다.
이곳은 통영으로 들어서는 입구로 여타 고을과 같이 공덕비와 열녀비 등이 많이 세워진 곳으로 현재도 여러 종류의 비석들이 있다. 이번에 발견된 비석들이 이곳에 집중적으로 세워진 비석들을 한 곳에 모은 것인지 통영 일대에 세워졌던 비석들을 한 곳으로 모아 매장한 것인지는 현재로써는 알 길이 없다.
임학종 국립진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어떤 이유로 묻혔던 24기의 통제사 비석을 발견한 것은 대한민국에서 처음이다. 통영의 경사다.”고 말했다.
비석 앞면에는 '가선대부 삼도수군통제사 이공세선영세불망비(嘉善大夫三道統制使李公永世不忘碑)' 또는 '가선대부행통제사 이공방일거사비(嘉善大夫行統制使李公邦一去思碑)' 등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 통제사 시절의 업적들이 새겨져 있으며 제65대 이세선 통제사는 139대 이방일 통제사의 증조부다.
비서에 새겨진 가선대부(嘉善大夫)란 글은 조선시대 종2품의 상당히 높은 품계를 말하며 가선대부에 올라야 통영제사가 될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이방일 통제사는 원문성을 개축하고 만하정을 신축했으며 열무정을 재건하는 등의 업적을 남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비석들은 통영시 문화예술과에서 통영 일대의 열녀, 효열비와 원문고개 통제사비를 정비하기 위해 조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됐다. 이번 발견으로 208명의 통제사 중 아직 발견되지 않은 통제사들의 비석들이 어딘가에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현재 통영 세병관에는 이와 같은 비석 60기가 발굴되어 세워져 있다. 이 비석들도 세병관에 보관될 방침이다.